코로나19 시대의 인지부조화
"우리는 반쯤만 공유된 신뢰할 수 없는 지각의 안갯속에서 살았다. 감각 데이터는 욕망과 믿음의 프리즘을 통과하며 왜곡되어 전달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기억 또한 왜곡되었다. 우리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보고 기억하며,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설득했다.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한 가차없는 객관성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회전략이었다." -이언 매큐언(소설 'Enduring Love', 1997)
'자신의 믿음 또는 확신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을 때, 잘못된 믿음을 인정하기보다는 현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왜곡한다’, 이를 심리학에서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나 신념, 믿음 등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태도를 바꾸어서라도 이를 해소하고자 하는 경향”이다. 인지부조화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의 선택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태도와 관련된 행위가 외적이고 상황적인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자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진 경우에만 인지부조화를 경험한다. 둘째, 선택한 행위가 원점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행위를 언제라도 변경할 수 있다면 인지부조화는 발생하지 않는다. 셋째, 선택한 행위의 결과가 예측 가능해야 한다. 즉 자신이 선택한 행위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을 알거나 예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한 경우에 인지부조화가 발생한다.
이처럼 인지 부조화가 발생하면 부조화를 최소화하기 위해 현실의 실제를 왜곡하여 그 부조화를 해소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이때 '중요성'(importance), '영향력'(influence), '보상'(reward)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자기 합리화의 크기와 정도가 결정된다. 말하자면, 자신의 선택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라 확신하면 할수록, 현실을 왜곡해서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태도를 자신의 선택에 맞추고, 부조화를 해소하고자 하는 의지도 더 커진다. 그래서 자신의 기대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자기의 기대·희망·확신에 부합하는 것만 부지런히 찾게 된다. 또 자신의 선택이, 어떤 형태의 외적 권위 등으로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현실을 왜곡해서라도 그 부조화와 해소의 의지도 덩달아 커진다. 또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보다는 부조화 상태에서 얻게 되는 이익, 즉 보상이 더 클 경우에, 다소 양심이 찔리고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그것을 억누르고 현실을 왜곡해서라도 부조화 상태를 그대로 수용한다.
사회 심리학자인 레온 페스팅거는 인지부조화 이론을 설명하면서 “실제로 인간의 행동은 보상 이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단히 놀라운 정신적 활동을 한다”라고 통찰하였다. 또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인지부조화의 해소 과정이 곧 행동의 합리화 과정이며, 따라서 어떤 선택에 따라 행동한 이후의 태도는 그 행동과 일치하도록 조정된다."고 통찰하였다. 이러한 경향성을 바탕으로 레온 페스팅거는,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기보다 합리화하는 동물이다."라고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인간은 자신의 삶이 부조리하지 않다고 스스로 설득하면서 생(生)을 보내는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매우 고질적이고 핵심적인 믿음을 가진다. 이 때문에 자기 믿음과는 전혀 다른 현실적인 증거가 사실로 드러나면, 그 새로운 증거를 사실로 인정할 수가 없게 된다. 대신에 그것은 '인지 부조화'라고 불리는 매우 불편한 느낌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래서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합리화하고, 무시하고, 심지어는 부정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프란츠 파농('검은 얼굴 하얀 가면', 1952)
정리하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 자신의 평소 생각과 태도에 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나는 상황에 마주하게 되면 인지부조화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편한 감정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인 행동-태도 사이의 부조화를 해소하고자, 현실을 왜곡해서라도, 생각과 태도를 자신의 선택에 부합하도록 수정한다. 그리고 특히 중요도가 높거나(importance), 파급되는 영향력이 크거나, 보상(reward)이 큰 쪽으로 더 큰 부조화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인지부조화 이론은, 인간이 왜, 어떻게 심리적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되는가에 대한 좋은 이해를 제공한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와 혼동하기 쉬운 개념으로, '인지왜곡'(cognitive distortions)이 있다. 인지왜곡은 정서(마음) 장애 혹은 성격 장애와 관련된 심리치료 이론 중의 하나인 인지치료의 주요 개념이다. 인지왜곡(인지적 오류)은, 개인이 지각하고 인지하는 현실, 상황, 사물 등을 왜곡된 신념과 그릇된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사고 습관이다. 쉽게 말하자면, 사고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에 왜곡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인지왜곡이다. 마치 빨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이, 전부 빨갛게 보이는 것과 같다. 인지부조화는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 이후에 부조화가 발생하여 왜곡이 이루어지고, 인지왜곡은 역기능적인 사고 체계를 바탕으로 아예 정보처리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왜곡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참고로 역기능이란, 본래 의도한 것과 반대로 작용하는 기능, 또는 비정상의 상태 또는 잘못된 상태로 기능하는 것을 의미한다. 컴퓨터에 A라는 데이터를 넣으면 반드시 B라는 결과물이 나오도록 프로그래밍을 했는데, 의도치않은 엉뚱한 결과물이 계속 나오는 것, 이게 바로 역기능이다. 인지치료의 창시자인 아론 벡은, 역기능적인 사고체계로 인하여 정보처리과정에서 자동적으로 인지왜곡이 발생하며, 그 결과로 현실 부적응의 상태로 이끌어 우울증, 정서장애, 성격장애를 유발한다고 보았다 인지치료의 창시자인 아론 벡은, 역기능적인 사고체계로 인하여 정보처리과정에서 자동적으로 인지왜곡이 발생하며, 그 결과로 현실 부적응의 상태로 이끌어 우울증, 정서장애, 성격장애를 유발한다고 보았다.
인지부조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조지오웰은 소설 '1984'에서 '이중사고'를 제시한다. 이중사고는 생각으로는 무언가가 모순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면서도 그 모순된 행위를 계속하는 경우다. 여기서 전형적인 인지부조화가 발생하는데, 이중사고는 이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왜곡 혹은 합리화가 아닌, 아예 자신의 모순된 행위에 대한 기억 자체를 끊임없이 말살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인지부조화는 자신의 자발적 선택으로부터 시작되고, 조지오웰이 말하는 이중사고는 거의 세뇌와 가까운 것으로 외적 압력에 순응하고자는 강력한 심리적 욕동으로부터 기인한다.
"'이중사고'란 낱말은 이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우선 이것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상반된 신념을 동시에 가지며, 그 두 가지 신념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불필요해진 사실은 잊어버렸다가 그것이 다시 필요해졌을 때 망각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며,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으로 언제나 부정해 버린 현실을 고려하는 등의 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조지오웰( 소설, '1984')
우리 옛 속담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있다. 그 뜻은 범죄로 죗값을 치르게 된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서글픈 자기 고백과 회한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먹고살기 위해서라지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현실적인 삶, 특히 먹고사는 문제는 참 어렵다. 인간은, 의식주라는 본능의 욕구 그리고 이왕이면 좀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와 연관된 사회적 욕구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지부조화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 또한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자기 기만과 이율배반적인 내 삶의 모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실제 하는 나의 민낯은 세상의 객관적 잣대로 보면, 어쩌면 한갓 속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다. 더욱이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또 책임지는 것이다. 내 삶은 그 누구도 나대신 떠맡아 책임져줄 수 있는 삶이 아니다. 개인의 삶은 그 삶의 실질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마땅히 존중받아야만 한다. 여기서 '존중'이란 말의 의미는 높임의 의미라기보다는, '감정, 생각, 정서, 선택, 신념, 삶의 이야기 등 그 모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또 자기 삶의 방식이 자기 양심에 거리낀다고 해서 그 삶의 태도와 행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여 스스로 기만할지라도 그 또한 개인의 자유다. 따라서 한 개인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잣대로든 판단할 자격이나 권리는 없다. 신경의학자인 올리버 색스의 말을 잠시 빌리면,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기 양심을 억누르고 자기를 합리화하며 자기를 기만하면서도, 자기 기만적인 삶의 방식에 어떤 형태의 권위를 덧칠하고 논리적 합리성과 상황적 정당성을 부여하여 자기의 상업적·사회적 상품 가치를 높이고자 시도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아울러 비판적 사고능력이 없는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여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언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스스로가 기만하는 삶의 방식을 주입하고자 시도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행위는 당연히 그 시시비비가 비판되어야 하고, 또 마땅히 경계해야만 할 일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지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정당화는, 그것이 현실 왜곡이든 자기 기만이든 간에, 자기 양심의 테두리 안에서만 허용 가능하고 또 유효한 자유 의지라는 말이다.
"죄책감은 자신을 고문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해냈고, 시간이 가면서 떠오르는 세미한 기억의 구슬들을 하나하나 실에 꿰어 평생 동안 돌리면서 기도해야 할 묵주로 만들어 놓았다." -이언 매큐언(소설 '속죄', 2001)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선인이 악인으로 변신한다거나, 악인이 선인으로 변하는 경우, 그 진위와 진정성을 구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다림의 시간뿐이다. 본색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드러난다. 배신을 해 본 사람이 또 배신한다. 먹고사는 문제 혹은 이해득실의 문제 혹은 더 나아가 절체절명의 절박한 상황과 맞물리게 되면, 사람의 본색은 백일하에 드러나고 그가 본래 추구한 바 목적이 선명해지기 마련이다. 비록 과거가 어떠하든지 간에 어느 순간 극에서 극으로 변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일 따름이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사람에 대한 어설픈 불신과 섣부른 편견에 있지 않다. 분별과 다름의 인정(認定)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성찰과 경계(警戒)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시대의 소음(2016)'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늑대는 양이 느끼는 공포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내가 즐겨 인용하는 문장이다. 현실의 경험으로 대중을 상대로 하는 문인, 학자, 종교인, 강연자, 작가, 지식인 들 중에 그들이 글로 문자로 말로 표명하는 신념· 사상· 담론 등이, 정작 그들이 몸담고 먹고사는 현실의 삶과는 괴리된 이율배반적인 인품(人品)의 사람들을 흔히 접한다. 다시 말해 '사람의 됨됨이' 또는 인성(人性)의 측면에서 그들이 보여 준 이미지, 그들이 내세우는 성공적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수준 이하 상식 이하의 실체를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록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더라도, 자기 밥그릇이 달리고 이해득실이 걸린 문제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선택에 맞도록 자신의 생각과 태도와 노선에 수정을 가하고 얼마든지 자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며,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앞뒷면 변신이 가능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경험적 사실 또는 경험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 개인의 삶에 국한된 것으로써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 혹은 편견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그들의 이미지에 대한 내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 또한 컸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몸소 체험하고 느낀 사실이라는 것 만큼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중국 유학(儒學)의 이단아로 불리우는 양명학자 이탁오(李贄)는 '분서(焚書)'에서 이런 자들을 특정하여 "요리조리 뒤집는 짓이나 반복하여 세상을 속이고 이익을 차지하니 명색은 처사인데, 그 마음은 장사치나 다름이 없고, 입으로는 도덕을 외치지만 뜻은 개구멍을 파는 도둑질에 있다. 명색은 산림처사라지만 마음이 장사치나 진배없으니, 이 얼마나 비천한 꼬락서니인가?"라고 그의 벗에게 한탄하는 편지 글을 썼다. 그는 '속분서(續焚書)'에서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대기에 급급했던 까닭이다." 라고 자신을 적나라하게 성찰한 인물이다. 다른 한 편으로 연상되는 속담이 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라는 속담, 또 '중이 고기맛을 알면 절간에 빈대도 안 남기고, 속인(俗人)도 고기맛을 알면 외양간 널빤지를 핥는다.' 라는 속담이다. '권력은 곧 마약이다'라는 말도 앞의 속담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 나역시 이러한 속담의 범주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비록 나는 글을 파는 장사치 또는 뒤로 개구멍을 파는 도둑은 아닐지라도, 곧잘 생각과 태도의 부조화때문에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이처럼 이유 없는 삶, 이야기가 없는 삶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오직 하나의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삶 또한 없다.
"내가 듣건대 '군자는 스스로 병이 되는 것이 셋이 있다 '고 한다. 선을 악으로 알거나 악을 선으로 그릇되게 아는 의견의 병(意見之病). 선인 줄 알면서도 선을 따르지 못하고 악인 줄 알면서 악을 버리지 못하는 지기(志氣)의 병(志氣之病). 선을 알면서 선을 따르지 못하고 그 따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저것은 진실로 선이 아니다.’라고 변명하고, 악이란 것을 알면서도 악을 버리지를 못하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이것은 진실로 악이 아니다.’라고 변명하고 고집하여 자기를 합리화하는 심술(心術)의 병(心術之病), 이 세 가지다. 의견의 병은 깨달아 알면 없앨 수 있고, 지기의 병은 의지를 갖고 힘써 노력하면 버릴 수 있으나, 심술의 병은 죽어야 끝날 뿐이다." -김매순( '應客' 응객 /臺山集 대산집)
어쨌든 인지부조화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최소한 이런 점에서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는 본능적 성향 또는 본질의 차원에서 서로 다를 바 없는 존재다. 다만 주관적 인지 혹은 인식의 틀에서 대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자각하는 사유의 방식만이 서로 다를 뿐이다.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그 주관적 인식의 틀에서 나오는 '망심도 내 마음이요 진심도 내 마음이라 단지 한마음의 다른 작용'에 불과하다. 삶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불구하고 선택의 연속이다. 비록 내 삶일지라도 항상 내 생각대로 내 의지대로 흘러가는 것만은 아닌 까닭에, 곧잘 잘못된 선택,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일이 허다하다. 문제는 잘못된 선택을 내린 이후에 있다. 이때 어김없이 인지부조화는 심리적으로 나를 얽매고 마음을 양심을 불편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지부조화의 상태에 직면했을 때,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철학자 칼 포퍼의 「논박과 추측」 서문(1962)에서 바람직한 해법 하나가 찾아진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 비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경험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태도를 가리켜 비판적 합리주의라고 한다. 실수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려면, 가장 먼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내 주관적인 인식 이외에도 얼마든지 다른 시각, 다른 생각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생각하고 보고 알고 이해하고 지각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갖는 일이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영화, '증인')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사람, 흠결이 없는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갓난 아기가 걸음마를 걷기 위해 얼마나 수없이 많은 넘어짐과 엎어짐을 반복하는가? 비록 내가 틀린 선택을 했을지라도, 비록 실수를 했을지라도, 그것이 곧 나의 어리석음, 나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틀린 것임을 깨닫고 실수를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인지부조화의 문제는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애써 자신을 교묘하게 합리화하고 굳이 자기를 기만할 필요조차 없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비록 실수를 하고 허물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자신을 기만하면서까지 자기합리화를 하고 다른 사람까지 그 기만의 장(場)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그 경험으로부터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정신적으로 건강한, 바람직한 사람일 것이다.
미셀푸코의 말로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리 인생에는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그런 순간들이 있다. 즉 '성찰과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라는 의문 말이다. 그렇다면 철학, 철학적 행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것(사유)을 비판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코로나19 시대의 인지부조화
(애틀란틱, Elliot Aronson, Carol Tavris)
천국의 문(Heaven’s Gate)이라는 종교 단체가 있었습니다. 천국의 문 회원들은 1997년에 지구에 가장 근접할 예정이던 헤일밥(Hale-Bopp) 혜성 뒤를 지구에서 자신을 구원해 우주로 데려가 줄 우주선이 따라온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회원 중에는 육안으로도 볼 수 있던 혜성을 더 자세히 보려고 값비싼 고해상도 천체 망원경을 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화를 내며 망원경을 환불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비싼 망원경이 불량품이라는 거였습니다. 혜성은 잘 보이는데, 혜성 뒤를 따라오고 있어야 하는 우주선이 아무리 봐도 안 보이니, 망원경이 불량품이 아니고선 이를 설명할 수 없다고 이들은 주장했죠. 헤일밥 혜성은 지구를 지나갔지만, 천국의 문 회원들이 기다리던 우주선은 오지 않았습니다. 예정대로 구원받아 우주로 가려면 세속의 껍질(신체)을 벗어야 한다고 믿던 회원 39명은 집단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천국의 문 회원들의 잘못된 믿음은 끔찍한 결말을 낳았습니다. 매우 극단적이지만, 동시에 천국의 문은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ce)의 아주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인지부조화란 나의 원래 생각과 행동이 실수였고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하고 과학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기 꺼려 하는 동기나 기제를 뜻합니다. 새로 알려진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목숨을 구할 수 있을 만큼 극단적인 경우에도 (천국의 문 회원들처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바로 이 인지부조화가 코로나19 팬데믹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인지부조화를 겪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사람은 자기 마음을 잘 바꾸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을 굳히면 좀처럼 이를 바꾸지 않죠. 그런데 새로 알려진 사실이 기존에 내가 하던 생각, 내가 믿는 바와 충돌하면? 새로 알려진 사실을 받아들이고 원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생각을 바꾸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나와 다른 사람의 건강을 해치더라도 말이죠.
인지부조화라는 개념은 1950년대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어(Leon Festinger)가 만들었습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생각 혹은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이 충돌할 때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 껄끄러움을 묘사하기 위해 만든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담배가 발암물질이며 건강에 해롭고, 담배 때문에 일찍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담배를 피웁니다.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생각과 행동의 부조화를 줄이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담배를 끊거나, 아니면 담배가 건강에 해롭지 않다는 근거를 찾아내고 논리를 만들어 흡연하는 행위를 정당화해야 합니다. ‘담배를 끊으면 당장 살이 찔 텐데, 비만도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담배가 백해무익하진 않아.’와 같은 식이죠. 페스팅어는 특히 사람들이 서로 충돌하는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고 부조화를 줄여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면서 정당화하려고 애를 쓰는지에 주목했습니다.
저자 중 한 명인 애런슨 박사는 페스팅어 교수의 제자로 인지부조화 이론을 꾸준히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특히 애런슨 박사는 내가 직접 연루된 생각이나 행동이 서로 충돌할 때 인지부조화가 얼마나 강력한 역할을 하는지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같은 인지부조화라도 새로 밝혀진 과학적인 사실이 가리키는 방향이 내 생각과 믿음, 행동이 잘못됐다고 지적할 때가 가장 쓰라리고 불편한 법입니다. 즉, 내가 친절하고, 도덕적이며, 능력 있고, 똑똑하다는 생각이 부정될 때 나는 가장 큰 위협을 느낍니다. 그 위협을 처음부터 느끼지 않으려고, 인지부조화에 빠지지 않으려는 기제가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그 순간부터 작동합니다. ‘이 차를 살 거야’, ‘이 후보를 찍을 거야’ 같은 결정은 말할 것도 없고, ‘코로나19는 정말 심각한 문제야’, 아니면 ‘코로나19 이거 순전히 사기야’ 같은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는 순간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찾게 되고, 그 생각에 어긋나는 근거는 내치기 시작합니다. 이 차를 사기로 하면, 이 차에 관한 좋은 점만 받아들이고, 단점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게 마음먹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정확히 몰라서 확신하기 어렵던 문제’도 금방 ‘정확히 모르지만, 그래도 확신할 수 있는 문제’로 변모합니다. 한번 결정을 내리고 나서 그 결정을 정당화하는 단계를 거칠 때마다 사실 내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특히 인지부조화를 모면하려고 명백한 사실을 부정한 결과 원래 문제가 더욱 커지면 내 실수를 인정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인지부조화 이론을 검증하고 사람의 마음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학자들이 진행한 실험만 3천 건이 넘습니다. 애런슨 박사가 한 실험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 이른바 “어려운 통과 의례”에 관한 실험입니다.
한 토론 동아리가 있습니다. 동아리에 들기 전에는 모르는데, 들고 나서 보면 동아리원들은 하나같이 거만하고, 토론도 따분하기 짝이 없는, 한 마디로 형편없는 동아리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긴 한데, 그 동아리에 어떻게 들었느냐에 따라 동아리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인지부조화 때문입니다. 즉, 이 동아리에 들기 위해 정말 불쾌하고 당혹스러운 과정을 참고 견뎌야 했던 실험 참가자들은 (형편없는 동아리지만) 어떻게든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동아리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반대로 그냥 신청서만 내면 동아리에서 받아준 경우에는 이상한 동아리원이 많고, 토론이 따분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동아리를 탈퇴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정말 어렵게, 험한 꼴을 봐가며 얻어낸 무언가가 시시하고 성가신 것으로 밝혀져서 내가 들인 노력과 품이 그저 시간 낭비로 밝혀지면 그 자체로 인지부조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식이죠.
‘어떻게 똑똑한 내가 이런 형편없는 동아리에 들려고 그런 노력을 헛되이 기울였단 말인가?’
이때 부조화를 줄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내가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건 애초에 선택지가 될 수 없죠. 그럼 남은 방법은 이 동아리가 알고 보면 형편없는 곳이 아니라 좋은 곳이라고 다시 평가하는 겁니다. 그런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되어야만, 내가 똑똑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동아리의 좋은 점만 애써 부각하고, 나쁜 점에는 눈을 감아버리게 됩니다. 반면에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동아리에 들어온 사람은 동아리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금방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애초에 갖은 노력을 기울여 어렵사리 들어온 동아리도 아니니, 이 동아리가 훌륭한 곳이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회심리학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지부조화 이론은 이내 실험실을 떠나 세상 곳곳에서 ‘발견’됐습니다. 잡지의 칼럼, 영화 리뷰, 심지어 유머 칼럼의 단골 소재가 됐죠. 그러나 정작 인지부조화라는 거대한 기제의 동력을, 또 우리가 인지부조화의 불편함을 해소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정당이나 정치인, 정치사상과 정치적인 신념을 향한 우리의 태도, 감정에서도 인지부조화가 일어납니다. 즉, 우리가 누군가, 어떤 대상을 정치적으로 지지하게 되면 그 호감과 충성도가 스스로 어떤 현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돼 버리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사회심리학자 리 로스(Lee Ross)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해묵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다음과 같은 실험을 고안해 진행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에 각각 양국 사이의 평화를 정착하는 방안을 내달라고 부탁한 다음에 서로 제안한 평화안에 이름표를 바꿔 붙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측이 낸 평화안에 팔레스타인의 제안이라고, 팔레스타인 측이 낸 평화안에 이스라엘의 제안이라고 명명한 겁니다. 그런 다음에 이스라엘 시민들에게 ‘팔레스타인 안’이 어떤지 평가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안’을 ‘팔레스타인 안’보다 훨씬 더 좋아했어요. 사실은 ‘이스라엘 안’이 팔레스타인 측에서 제안한 것이었는데 말이죠. 우리 편에서 낸 제안에 상대편 이름표를 붙였더니 그 제안을 일축하고, 상대방이 낸 제안을 이름표만 보고 좋다고 고른 겁니다.”
정치적 양극화가 그 어느 때보다 심한 미국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하자, 우리는 생과 사를 가를 수 있는 문제마저 의료·보건 전문가의 조언이 아니라 정치적인 진영 논리에 따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리더십이 실종된 상황에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과학적 사실에도 미국은 합의하지 못했죠. 그 결과 미국인은 팬데믹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두고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게 됐습니다. 하나는 과학자와 의료·보건 전문가들이 내놓는 분석과 조언입니다. 이 조언은 바이러스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바뀔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과 추종자들이 내놓은 마스크 쓸 필요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효과 없다는 주장이죠. 과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한 지 넉 달이 더 지난 미국에서 사람들이 ‘얼른 출퇴근하면서 일하고 싶다, 자주 가던 바에 가서 친구들하고 술 한잔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과 바람은 과학자와 의료·보건 전문가들의 조언을 거스르는 ‘위험한 일’입니다. 본인은 아프지 않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무증상 감염의 숙주가 되어 가족 중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는 행동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지부조화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먼저 친구들을 만나서 예전처럼 수다 떨고 술 마시고 싶은 바람을 억제하고,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방법이 있습니다. 과학자와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는 거죠. 아니면 코로나19에 대한 이 모든 뉴스는 다 가짜뉴스이므로, 예전처럼 바에 가서 친구들과 술 마시고 노는 방법도 있습니다. 마스크 따위는 쓰지 않아도 된다고 트럼프 대통령도 말했으니까요. 다만 우리가 누구나 하고 있는 기본적인 전제를 거스르지는 말아야 합니다. 즉 우리는 누구나 나는 똑똑하고 유능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해치는 어리석은 짓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선택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스크가 바이러스 확산을 차단하는 건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마스크를 쓰면 숨쉬기가 불편해서 호흡기에 문제가 생길 거라는 논리를 펴거나, 아니면 아예 팬데믹 자체가 심각하지 않다고 믿으면 됩니다. 아니면 공중보건 못지않게, 혹은 공중보건보다 더 중요한 게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리”라고 우기는 방법도 있습니다. 팜비치 카운티의 한 공청회에 증인으로 나선 사람들이 정확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마스크를 쓰라고 강제하는 건 진짜 공산주의 독재정권에서나 생각할 법한 끔찍한 일로 위대한 미국 헌법이 보장한 자유를 짓밟는 행위다.”
“마스크가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말한 이도 있었습니다. 사우스다코다의 크리스티 노엠 주지사(공화)는 마스크를 비롯해 정부가 간섭하는 일 전반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법은 간단하다. 정부의 간섭은 최소화하고 더 많은 자유를 주면 된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인지부조화를 줄이는 데 보탬이 되고자 정당화할 구실을 줬죠. 펜스 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유세 현장에 대규모 군중이 마스크도 쓰지 않고 모이면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질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우려를 일축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화롭게 모여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할 수 있는 권리는 다름 아니라 미국 수정헌법 1조가 보장한 기본권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가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전염병에서 시작된 위기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정보를 토대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어느 시점이 되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종식해도 될지, 내 가게는 언제 다시 열 수 있을지, 언제 다시 친구, 직장 동료와 만나 술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할 수 있을지, 온라인이나 앱으로 말고 진짜 만나서 데이트는 언제 할 수 있을지, 여행은 언제 갈 수 있을지 아무도 정답을 모릅니다. 어느 정도까지 위험을 감수하겠냐고 물으면 그에 대한 답도 제각각일 겁니다. 어떤 답을 내리든, 위의 질문에 대한 생각, 의견은 결국 나 자신의 건강은 물론 공중 보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도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인지부조화를 피하고 줄이려는 우리의 무의식적 의지가 작동합니다. 한번 결정을 내리고 나면 그 결정에 맞춰 다음 행동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유연한 태도를 잃지 않으며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면 이를 배우고 받아들일지, 아니면 처음에 결정한 바를 뒤 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일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지금까지 사람이 마음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실제로 마음을 바꾸기란 참 어렵다는 이야기만 했는데, 그렇다고 마음을 바꾸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관건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내가 얼마든지 실수하고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매번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주어진 정보를 최대한 꼼꼼히 확인하고 판단하되 과학적인 증거가 새로 나오면 이를 곧바로 반영하고 필요하면 의견을 바꾸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의료·보건 전문가들이 하고 있는 게 정확히 그 작업입니다. 내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려면 꾸준히 나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섣불리 내 결정을 정당화해서 불편한 인지부조화를 줄이는 대신, 부조화를 마주 보고 어디서 이 불편한 감정이 생겼는지를 따져 봐야 하죠.
부조화의 작동 원리를 살펴보면 이를 극복하는 실마리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먼저 부조화가 일어난다면 반드시 서로 충돌하는 두 가지 생각 혹은 생각이나 행동이 있다고 했었죠. 그 두 가지를 철저히 분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해법”이라고 부르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의 페레스 전 총리가 실제로 겪었던 일을 토대로 만든 말인데, 당시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독일 비트부르크의 공동묘지를 방문해 이스라엘이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던 적이 있습니다. 비트부르크의 공동묘지에는 히틀러의 친위대로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와픈SS(Waffen SS) 조직원의 일부가 묻혀있는 곳입니다. 여기에 레이건 대통령이 가서 참배하고 온 겁니다. 레이건 대통령과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웠던 페레스 총리로서는 실로 난처한 상황이 된 겁니다. 곧바로 레이건 대통령의 ‘부적절한 참배’에 대한 총리의 의견을 밝혀달라는 요청이 쏟아집니다. 이때 페레스 총리가 인지부조화를 해소하는 걸 중시했다면 이렇게 했을 겁니다. 레이건 대통령과 우호적인 관계를 끊어버리고 철천지원수가 되거나 아니면 친구의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겁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고 갔을 거라는 식으로 두둔하는 거죠. 그런데 페레스 총리의 선택은 이도 저도 아니었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했죠.
“친구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친구는 계속 친구로 남고, 실수도 그대로 실수일 뿐인 것으로 하겠다고요.”
‘시몬 페레스 해법’의 핵심은 인지부조화의 불편함을 받아들인 데 있습니다. 엄연히 일어난 일을 애써 부정하지 않고, 섣불리 정당화하려 하지 않았죠. 아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수도 없이 던졌을 겁니다.
‘내가 내린 이 결정의 근거가 뭐였지? 내가 왜 지금 이렇게 행동하고 있지?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 맞나? 혹시 즉각적인 감정이나 선입견에 휩쓸려 결정을 내린 측면은 없나? 여기까지 오기 위해 내가 기울인 노력 때문에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건 없을까?’
명절 때면 만나는 친척 가운데 유달리 말이 통하지 않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 사람의 정치 성향이나 지지 정당을 내가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이유도 인지부조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친척이 오랜 시간 품과 돈을 들여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면 가능성은 거의 0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사람도 똑같이 당신을 고집불통이라며 이해 못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지 않나요? 그렇더라도 만약에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꿔보려고 시도라도 해보고 싶다면, 절대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어선 안 됩니다. “그런데 도대체 마스크를 안 쓰는 이유가 뭐예요?”라는 식으로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너 대체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니? 뇌가 있기는 하니?”와 같은 말로 들릴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당장 인지부조화를 줄이지 않으면 불편함을 견딜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이런 식으로 생각이 굳어질 겁니다.
‘나는 똑똑한데, 지금 얘가 나보고 멍청하다고 한 거네. 내가 똑똑한 건 분명한 사실인데, 쟤는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마스크가 진짜 필요 없는 게 맞나보다.’
반대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그 친척이 지지하는 정당 사람 가운데 생각을 바꾼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겁니다. 철저히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요. 공화당 정치인들 가운데 뒤늦게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주장을 바꾼 사람들이 있습니다. 테네시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 라마 알렉산더(공화) 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정쟁의 소재가 됐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트럼프를 지지하면 마스크를 쓰지 말자, 트럼프에 반대하는 사람만 마스크를 쓴다는 식의 논쟁은 소모적일뿐더러 그로 인한 피해가 너무나 커서 문제입니다.”
과학자들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알게 될수록 우리도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올 겁니다. 지금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규범, 행동도 언젠가는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지금 생각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믿으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도 있습니다. 대신 그렇게 하면 기적처럼 바이러스가 사라지지 않는 것 외에 팬데믹을 극복할 해결책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껏 설파해 온 유일한 해법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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