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분이 쳐져 있었는데 미친 듯이 웃은 기억만 난다. 그날 나는 ‘6시 내고향 방송사고’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봤는데, KBS 김재원 아나운서가 TV프로그램 <6시 내고향>을 진행하는 도중 앉아 있던 의자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의자가 한번 푹 꺼지더니, 계속 낮아졌다. 김재원 아나운서는 처음 잠시 놀라고 웃음을 잘 참아 넘겼지만 점점 의자가 아래로 내려가자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필이면 방송 마무리 타이밍이라 카메라가 자료화면으로 넘어가는 일도 불가능하던 때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숨도 못 쉬고 웃었다. 함께 꽤 오래 방송을 한데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방송인이기 때문에 웃는 내내 죄책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이와 비슷한 의미에서 나를 웃기는 영상이 있다. 유튜브 검색어는 ‘두 번씩이나 이 거지같은 섬에 버려지다니’다. <무한도전>에서 광희씨가 <캐리비언의 해적> 잭 스패로우 목소리 더빙 발연기를 선보이는 장면이다. 불시에 발생한 방송사고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형편없는 발연기. 열심히 할수록 웃긴다.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완벽한’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볼 때 느끼는 경이로운 만족감은 동경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남이 실수하는 모습은 뭐랄까, 의도치 않게 쾌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의 속 좁음에 반성하게 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샤덴프로이데라는 독일어가 있다. 샤덴(Schaden)은 피해나 손상을, 프로이데(freude)는 기쁨이나 즐거움을 의미한다는데, 그래서 ‘피해를 즐긴다’는 뜻이 된다. 다만, ‘타인’의 피해다. 남의 불행이나 불운을 즐기는 마음. 샤덴프로이데에 대해 책 한 권을 할애한 티파니 와트 스미스의 <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날까>는 TED 강연 ‘인간 감정의 역사’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 따르면 니체도 <도덕의 계보>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남의 고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남을 고통스럽게 만들면 훨씬 더 기분이 좋다. 냉정한 말이지만, 강력하고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원칙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누군가가 갑작스러운 대참사를 당할 때 가장 친밀한 이들조차 항상 느끼는 기묘한 내적 만족감, 진정으로 안타깝고 측은하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찾아드는 감정”. 이 감정을 대놓고 전시하는 사람은 가까이하고 싶지 않지만, 누구나 이 감정을 느끼기는 하는 것이다.
샤덴프로이데에 최적화된 공간, 온라인
인터넷과 SNS는 샤덴프로이데에 최적화된 공간이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조롱도 사람을 대면해야 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익명의 개인으로 아무말이나 쏟아내는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깐이면 누군가가 불행을 겪는 과정을 무한대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실수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큰 인기다.
TED 강연 중 최다 조회 수를 기록한 영상이 3000만 회인데, 걸음마를 시작한 딸에게 성기를 걷어차인 아버지 영상은 2억5600회가 넘는다. 티파니 와트 스미스가 인용한 2011년 옥스퍼드대학의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오직’ 슬랩스틱 코미디를 볼 때만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었다. 이런 폭소는 다른 종류의 웃음이 줄 수 없는 가벼운 도취감을 만들어내고, 실험 결과에 따르면 통증 감도를 10퍼센트까지 줄여준다. 계급이 엄격히 인간을 지배하던 사회에서 귀족들은 공공장소에서 폭소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고, 폭소는 낮은 계급 사람들의 전유물 같은 것이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역시 이 연장에서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날까>는 흔히 사람들이 샤덴프로이데라는 표현으로 퉁치는 감정의 유형을 다섯 가지로 분석하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다음과 같은 표현이다.
“잘난 척하거나 위선적이거나 법을 어긴 사람이 마땅한 벌을 받으면 샤덴프로이데라는 감정도 정당하게 느껴진다”
과거 자신이 했던 말과 상반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다면, 과거 발언과 현재 발언을 두 장의 사진으로(이때 주로 캡처가 쓰인다) 게시하면서 ‘두 컷 만화’라고 부르는 것도 이 맥락이다.
과거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미투 고발을 당해 크게 망신을 당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추락할 때 경험하는 샤덴프로이데는 정의감과 닮았다. 한편 SNS에서 누군가의 발언이 계속 공유되며 비난받고 희화화될 때(트위터 이용자들은 이런 일을 ‘조리돌림’이라고 부른다) “처음엔 ‘와, 또 누가 망했구나’ 싶어 조금 즐거운 기분이었다”라는 기분을 느껴봤다는 영국 작가 론 존슨의 말은, 누가 이미 충분히 비판하는 말들을 보았음에도 계속 공유하고 더 비판적인 말을 늘어놓는 심리의 저간을 드러내 보여준다.
샤덴프로이데는 나만 경험하는 은밀한 웃음에 그치지 않는다. 타인이 나를 보며 은밀한 ‘고소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일터에서의 샤덴프로이데는 무엇일까. 매일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샤덴프로이데를 느낄 때는, “우리가 옆으로 밀려나거나 누군가가 자기를 띄우려 든다는 의혹이 들 때 발생한다.” 그런 일을 주도한 사람의 기획이 비판받거나 채택되지 않을 때 말이다.
샤덴프로이데는 인간적인 반응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알게 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느낄 때는 불편한 마음이 동시에 솟는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것처럼 남도 나에 대해 느낄 수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농담이나 풍자라고 생각하고 끝도 없이 남을 (결과적으로) 희화화하는 행위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바라기는 부디 그렇기를.
이다혜 | 아직은 회사원. 현재 <씨네21>에서 편집팀장으로 일한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 팟캐스트 <이다혜의 21세기 씨네픽스>를 진행 중이다. 펴낸 책으로는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토의 밤 산책자>, <아무튼, 스릴러>,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책읽기 좋은날>, <출근길의 주문> 등이 있다.